글쓰기와 노동자 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19세기 유럽의 많은 노동자들은 노동을 마친 뒤 밤 시간에 공부하고 글쓰고, 때로는 그림이나 합창을 했다. 낮에는 공장과 작업장에서 고되게 일했지만 밤은 그들에게 사유와 창작의 시간이자 인간다운 삶을 되찾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이를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라고 불렀다. 그는 밤을 단순한 은유로 쓰지 않았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문화활동을 한 실제의 시간, 자신들의 언어와 희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빛을 밝혔던 밤이었다.
◇ 지옥의 문과 천국의 문 사이
1830년대 산업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노동자들의 하루는 참혹한 고통으로 채워졌다. 오늘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동조건과 장시간 노동이 만연했다. 대개는 이른 아침, 심지어 새벽 6시부터 노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목수 고니(Gauny)는 이를 시가 없는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불행한 숭고! 당신은 슬픔 중의 슬픔인 통속적 슬픔을, 함정에 빠진 사자의 슬픔을, 작업장의 끔찍한 주기의 먹이가 된 평민의 슬픔을, 장시간 노동의 권태와 광기에 의해 정신과 신체를 부식하는 이 징벌의 원천을 알지 못했다. 아! 늙은 단테여, 진짜 지옥을, 시가 없는 지옥을 여행해보지 못한 너에게 작별 인사를!" 문학동네, 38쪽
아침은 지옥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단테가 묘사한 저승보다 더 끔찍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낮은 단순한 노동의 반복과 통제로 숨막히는 지옥같았다. 감시자와 부자유! 그러나 밤은 달랐다. 그들은 등잔불 아래 책을 펼쳤고 시를 적었으며 서로의 글을 낭독했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1장 제목을 '지옥의 문'으로, 2장은 '천국의 문'이라고 붙인다.
밤은 천국이지만 동시에 긴장과 희생이 필요한 공간이다. 피곤에 짓눌린 몸을 일으켜 세워 가족이 잠든 방 한쪽에서 촛불을 밝혀야 했다. 이들은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글을 썼다. 랑시에르는 글쓰기는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하는 저항이었음을 강조한다. 즉 글쓰기는 이미 해방된 주체로서 행동하는 실천이었다. 그들에게 문학은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생존의 다른 방식, 즉 인간다움을 누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지옥의 문과 천국의 문이라는 이중 문턱을 오가는 노동자의 삶은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20세기 후반까지 한국 노동현장의 현실이기도 했다. 어쩌면 일각에서는 지금도. 하지만 우리 노동자들은 배우기 위해 야학을 찾았고 더러는 야간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일터를 다니면서 문학을 읽고 시와 소설을 썼다. 회사 내에서 조합 혹은 동아리를 통해 문화 예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
◇ 감각의 분할을 넘어서서
밤이 천국인 것은 당시 공장주와 감독관이 지배하지 못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낮시간은 온갖 규율과 통제로 가득했다. 이는 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말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을 분할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랑시에르는 '1833년 파리의 파업 참가자들의 강령 3항'을 언급하며 이를 분할의 한 사례로 말한다. 파업의 요구조건은 다음 세 가지였다. "담배를 피울 권리, 신문을 읽을 권리, 장인이 작업장에 들어설 때 모자를 벗을 것." 오늘날에는 쉬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다.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이거나 모여서 대화하는 것을 금했고, 신문 읽기와 같은 지적 행위를 막았으며, 노동자와 장인(기술노동자)을 분할하여 후자에게 특권을 주는 방식으로 차별했던 것이다.
가혹한 육체노동은 미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랑시에르는 한 아동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아이가 쓴 글은 마치 종교적인 환상 체험처럼 보일 정도로 감각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내게는 하늘의 하프가, 찬란하게 빛나는 미래가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작업장으로 돌아올 때 그 꿈은 명확히 깨진다. 공장주들은 아이들의 연약한 힘을 착취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다른 세계에 대한 모든 감성을, 하늘이 내린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시적이고 고급스러운’ 모든 것을 죽여 버리는 데 집착한다. 153쪽
'감각의 분할'이라는 개념으로 랑시에르는 사회가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위계화하는지를 해부하고 날 서게 비판했다. 낮의 지옥은 그들이 손과 몸만 쓰는 자로 강제된 시간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밤시간에 쓰기를 통해 해방을 경험하고 실천했다. 이 점을 강조하며, 랑시에르는 이미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등이란 미래의 언젠가 이룰 꿈이 아니란 것이다. 이미 평등한 주체로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19세기 노동자 작가들이 글을 쓰는 밤시간은 '지식인'과 '노동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사유하고 말할 수 있는 평등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해방의 순간이었다. 그 쓰기는 을들의 자기 해방 행위이자 더 나은 삶을 위한 학습이었다.
◇ 영혼의 에피쿠로스주의자
흥미롭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노동자 작가들을 '에피쿠로스주의자'로 비유한다. 흔히 에피쿠로스주의라고 하면 쾌락주의로 오해하지만,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정신적 평온 즉 곧 아타락시아(ataraxia)를 수행하고 향유했다. 에피쿠로스는 공동체였다. 그들의 정원은 소박한 식사와 우정, 낮 시간의 간단한 노동과 사색적 대화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었다. 당시 철학 유파들은 귀족과 왕족의 자체만 받아들인 반면 에피쿠로스는 노예와 여성, 외국인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정원은 차별과 서열이 철저하게 배제된 수평적 공동체였다.
19세기 노동자들은 문학과 문화 활동을 하며 사유하고 글쓰기로 서로를 초대하고 환대했다. 당시 생시몽주의 노동자들이 사람들을 모아 대화하고, 식사하며, 새로운 우애의 종교를 꿈꾸었던 장면은 바로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연상시킨다. 이들에게 글쓰기는 피폐해진 영혼을 가꾸는 향락이었고, 시와 노래는 고통을 잊게 하는 치유이기도 했다. 랑시에르가 19세기 노동자들을 에피쿠로스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에는 깊은 경의와 찬사가 담겨있는 듯하다. 그들은 에피쿠로스 정원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과 장시간 노동 속에서도 책과 펜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문학은 이렇게 탄생한다. 노동자 작가들의 글이 숭고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문화 취미활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 모든 것이 곧 해방의 몸짓이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작가들은 글쓰기 노동자 혹은 예술노동자로서 살아간다. 극소수 외에는 대부분 빈곤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쓰기와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작업 속에서 자유와 희열을 경험하고 자기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직장에 근무하며 작업하는 작가만을 노동자 작가라고 말하긴 곤란할 것 같다. 예술계나 문학계에서 뭐라고 말하든, 시인과 소설가, 습작하는 예비 작가, 회화 작가 및 음악가, 아마추어 아티스트들도 모두 예술노동자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작가로 존중하고 그들의 작품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들의 모든 작업과 행위 속에 실로 삶다운 삶의 씨앗이 담겨 있지 않은가?
◇ 우리의 다른 밤을 위하여
오늘날 우리는 19세기와는 다른 형태의 지옥을 산다. 생업과 스마트폰 알림과 SNS 과잉노동으로 분주한 지옥,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이 모든 사람을 옥죄는 이상한 지옥, 배고프지 않으면서 허기진 지옥, 사슬이 없는데도 정작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기 힘든 직업 전선이라는 지옥 말이다.
우리에게도 밤이 필요하다. 글을 쓰고 예술을 향유하며 우애와 연대를 만들어가는 밝은 밤 말이다. 오늘날의 에피쿠로스 정원은 마을 모임, 독서동아리, 조합, 도서관, 작은 모임, 공동체 공간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소박한 대화와 학습과 우정으로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 글쓰기와 예술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신성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 지식과 문화 예술을 독점하려 들지 말 일이다. 더 이상 노동자와 지식인, 신체노동과 지식노동,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하지 못하는 자,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세계를 분할하지 말지어다.
오늘날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소박한 정원을 열어 서로를 환대한다. 화려한 소비와 짜릿한 놀이를 좇기보다 우리들의 밤을 준비한다. 차별과 혐오라는 사회적 어둠을 몰아내는 밤, 글쓰기 행위와 대화, 자유로운 놀이, 타자를 향한 환대로 평등을 맛보는 명랑한 밤을 만들어낸다. 글 쓰고 말하고 문화 예술을 공유하는 이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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