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만에 고국 돌아오는 독립군 영웅 '홍범도 장군'

뉴스트리 / 기사승인 : 2021-08-12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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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야기] 일평생 '대종교인-독립군' 삶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연거푸 승리로 이끌어
▲독립군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고국강토에 돌아오신다. 차디찬 중앙아시아 들판에 잠든지 어언 78년만에 그토록 바라시던 해방된 고국의 땅으로 돌아오신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의 서문 밖에서 양반집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는 그가 아홉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다. 이후 그의 삶은 말그대로 파란만장했다. 머슴, 군인, 종이공장 노동자, 승려, 포수, 의병, 광산 노동자, 독립군, 농부, 부두 노동자,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마지막 직업은 극장 수위였다.

수많은 직업을 거친 그였지만 그의 삶을 관통하는 2가지는 '대종교인' 그리고 '독립군'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27살 때 강원도 단발령에서 황해도 출신의 동지 김수협과 함께 일본군 12명을 처단한 이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52살에 이르기까지 그는 싸우고 또 싸웠다. 홍범도는 독립전쟁 역사상 가장 많이 싸웠고, 가장 많이 이겼으며, 가장 오래 투쟁했다. 일제가 두려워한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족 모두를 잃었다. 부인은 1908년 3월 함경남도 북청에서 일본경찰의 취조를 받는도중 스스로 혀를 끊어내는 등 저항하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숨졌다. 장남 홍양순 선생은 1907년 북청에서 홍범도 의병부대에 들어가 이듬해 함남 정평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순국했다

홍범도는 봉건왕조 말기의 계급사회에서 최하층민으로 태어나 가난과 억압, 차별을 온몸으로 견디며 돌파한 변방의 장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포수의 신분으로 유인석 의병대의 선봉장을 맡았던 김백선은 양반인 동료지휘관에게 포살당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은 이인영이 결성한 13도 창의군에서 홍범도와 신돌석은 제외됐다. 그들은 막강한 전력으로 가장 잘 싸웠지만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망한 나라의 사대부들에게 견제와 비토를 당했다. 이때 홍범도가 접한 사상이 바로 대종교였다.

항일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던 대종교의 주축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문 출신들이었다.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가문, 경주김씨 종중 무원 김교헌, 보재 이상설, 석주 이상룡, 예관 신규식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종교인들이 명문가 출신들이었다,

홍암 나철은 대종교를 중광함에 있어 교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인 '봉교과규'를 제정했다. 그것은 '1. 오색인종 차별금지 2. 남녀차별금지(신분차별금지), 3. 종교차별금지'가 그것이다. 교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었다. 이때가 1909년이다. 대종교는 인종과 신분, 종교의 차별없이 오직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전쟁에 교단의 모든 것을 바쳤던 거다.

대종교의 교의는 '홍익인간'이다. '홍익인간'이 교의인 전세계 유일한 종단이다. '홍익인간'의 사상으로 '재세이화' 하여 '이화세계'를 만드는 것이 대종교의 교의다. 여기에는 인종, 신분, 종교를 나누는 개념 자체가 없다. 대종교의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북로군정서의 대종교인들은 바로 이 홍익인간의 사상으로 사기를 북돋우고 봉오동,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홍범도가 평생을 대종교인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홍범도가 글을 깨치고 대종교인이 된 후 그의 사상적 스승은 홍암 나철이었다. 역사의 스승은 무원 김교헌, 개인이 아닌 부하를 거느리는 독립군 장군으로서의 군교일치, 병법의 스승은 백포 서일이었다. 백포 서일,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의 묘를 모신 대종교 삼종사묘는 중국 화룡시 문화보호 문물단위로 지정돼 있다. 삼종사님의 유해를 봉환해 오는 것이 필자의 지극히 간절한 소망이다.

홍범도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부득이하게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러시아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다.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됐다. 홍범도의 상관은 백포 서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홍범도는 독립군 내 공산당 파벌 싸움으로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됐고, 독립군은 와해된다.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 투쟁단체의 해산이 이뤄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독립군은 무장 해제됐다. 일부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지만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러시아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이때 재혼하게 된다.

홍범도 장군은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극동피압박인민대회 혹은 원동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이때 레닌은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을 선물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을 단독면담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다.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의 지도자가 됐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홍범도 일지'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 활동했지만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 강제이주가 실시되면서 현재의 카자흐스탄 땅으로 이동했다. 고려인 극장에서 고려인 희곡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게 된 그는 매월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생활했다.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에게 독립운동 활동당시를 구술했고,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가 만들어졌다. 홍범도 일지를 토대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상영됐다.

1942년 4월 고려극장이 우스또베로 옮겨가면서 그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홍범도의 묘는 196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이장했으며,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됐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됐다.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사업도 1994년 김영삼 정부 때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처음 추진됐으나 현지동포들이 '카자흐스탄 동포들의 상징'과 같은 곳이라며 보존을 희망하면서 무산된 바 있다. 이후에는 유해가 고향인 평양에 안치되어야 한다는 북한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당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카자흐스탄 정부의 협조로 이번에 유해봉환이 성사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을 지휘하며 철칙으로 삼았던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잘못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오직 그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만이 잘못된 사람이다. 둘째, 남의 말만 듣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 남을 나쁘게 말하는 자가 정말 나쁜 자인 경우가 더 많다. 셋째, 강한 자에게 비굴하지 말고 약한 자를 항상 도와주어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홍범도 장군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해군은 214급 잠수함(1800T급) 7번함의 함명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했다.


          날으는 홍범도가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행야,에행야,에행야,에행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오연발 탄환에는 군물이 돌고
   화승대 구심에는 내물이 돈다
   에행야,에행야,에행야,에행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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