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숙의 토닥토닥] 이별은 싫지만 절 받으세요

김향숙 작가, 교육자, 前 혁신학교 교장 / 기사승인 : 2024-09-24 08:00:02
  • -
  • +
  • 인쇄

추석명절에 가족들이 다 모였다. 모처럼 만난 조카들이 집안 어른에게 절을 올렸다. 엎드리고 있는 아이들의 등을 보니 든든하고 대견해 쓸어주고 싶었다. 공경과 겸손이 익어가는 그 모습에 절로 콧등이 시큰거렸다.

명절은 이렇게 제 피붙이들을 한 번 더 살갑게 이어붙이게 한다. 이런 분위기에 젖으니 나도 어린아이에게 절을 받던 추억이 떠오른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옆 반 아이였다. 책 읽는 나를 자주 보았다며 놀러 오곤 했다. 자주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아이네 가족사까지 알아버릴 정도로 친해졌다. 나는 이맘때가 되면 언제나 그 아이가 생각난다.

저학년 때부터 하람이는 내 방에 자주 찾아왔다. 책을 많이 읽어서 또래들보다 이해력이 빨랐다. 그래서인지 친구와의 관계에서 자주 답답해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내 방에 찾아오곤 했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차 발길이 뜸해졌다.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진 것이다. 가끔 먼발치에서 하람이는 손을 흔들어 우정을 표현했다. "곧 놀러 갈게요."

어느 날 하람이가 자신의 기쁨을 전하러 왔다. "이제 게임을 두 시간 정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 학기 동안 부모님과의 약속을 잘 실천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하람이는 걱정도 털어놓았다. "어른들은 언제 또 약속을 깨뜨릴지 모르잖아요." 부모님이 규칙을 바꾸면 게임을 못 하게 되거나 게임 시간이 언제 줄어들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서 좋아요. 아이들을 잘 이해해주시잖아요."

4학년 어느 날, 하람이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저 호주로 이사 가요. 정말 가기 싫어요.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뜻밖의 소식이었다. "선생님, 이별은 너무 싫지만 제 절 받으세요." 갑자기 하람이가 바닥에 엎드려 넙죽 큰 절을 했다.

"하람아, 새로운 경험도 하고 좋을 것 같은데, 왜 가기 싫으니?"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답답해서 어떻게 살아요?"

얼굴에 아이 특유의 억울함 반 아쉬움 반이 가득했다. "가족이 함께 가는데 뭐가 걱정이니? 너는 거기서도 잘할 거야."

위로와 격려를 쏟았지만 하람이는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아마 정든 학교와 친구를 떠나는 아쉬움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막연한 불안감을 그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선생님, 꼭 다시 돌아올게요!" 하람이는 문을 열고서 발은 문밖에 내밀고 고개는 여전히 방 안으로 향한 채 연신 손을 흔들었다. 오래오래.

되돌아보니 하람이의 큰절이 기특하다. 아이가 어떻게 절을 하려는 생각을 다 했을까? 그 절을 받고서 나는 큰 벼슬이라도 한 사람처럼 우쭐해졌다. 가끔 다사랑실 바닥을 보면 하람이가 선사한 절의 여운이 전해져 왔다.

그렇게 큰절을 하고 떠나간 우리 하람이가 돌아왔다. "선생님 제가 꼭 다시 돌아온다고 했죠?" "와아, 우리 하람이가 약속을 지켰구나."

우리는 이산가족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하람이는 다시 우리 학교로 오게 되어 기뻤지만 아쉬운 게 하나 있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선생님과 함께하는 6학년 교육활동이 중단되어 책모임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크게 아쉽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람이는 학교에 오는 날이면 매일 다사랑방으로 찾아왔다.

하람이는 책을 많이 읽는 아이다. 교장실에 오면 주로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하람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이트』, 『사피엔스』와 같은 제목을 언급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아빠가 읽는데 내용이 어렵다고 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에이트'는 아빠가 읽고 있어서 아빠랑 같이 대화해봤어요. 선생님은 어땠어요?"
"4차 산업 시대에 우리 교육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서 선생님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선생님처럼 책을 많이 읽는 어른은 처음이에요."

하람이와 책 이야기를 할 때면 즐거운 한편 긴장되기도 했다. 하람이는 아직 초등학생이지만 책의 핵심을 잘 짚어낸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소감을 명료하게 표현한다. 우리 학교에 이렇게 독서를 많이 하는 아이가 있다는 게 든든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에게 절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때, 하람이는 외할머니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방학 때가 아니면 자주 만날 수 없었기에 뵐 때마다 절을 했던 것 같다. 하람이는 한없이 좋아하는 마음을 절로 표현한 게 아닐까. 올해는 폭염에 눌려 가을이 늦게 찾아왔다.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왁자지껄한 독서를 기대해본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 김향숙작가, 교육자, 前 혁신학교 교장 hanqqi321@naver.com  다른기사보기

핫이슈

+

Video

+

ESG

+

삼성전자, 5년간 6만명 신규채용...'반도체·바이오·AI' 중심

삼성전자가 성장사업 육성과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앞으로 5년간 6만명을 신규 채용하겠다고 18일 밝혔다. 매년 1만2000명씩 채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상장기업 보고, 6개월로 바꾸자"...트럼프 주장에 美 또 '술렁'

미국 상장기업의 보고서가 분기에서 반기로 변경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17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장기업의

카카오, 지역 AI생태계 조성 위해 5년간 '500억원' 푼다

카카오그룹이 앞으로 5년간 5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지역 인공지능(AI) 생태계 육성에 투자한다고 18일 밝혔다. 카카오그룹은 지역 AI 육성을 위한 거점

[ESG;NOW] 올해 RE100 100% 목표 LG엔솔 '절반의 성공'

국내 많은 기업들이 지속가능한 경영을 내세우면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보고서 혹은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주기적으로 발간하고 있

HLB, HLB사이언스 흡수합병..."글로벌 신약개발 역량 고도화"

글로벌 항암제 개발기업 'HLB'와 펩타이드 기반 신약개발 기업인 'HLB사이언스'가 합병한다.HLB와 HLB사이언스는 17일 각각 이사회를 열고 두 회사의 합병

[르포] 플라스틱을 바이오가스로?...'2025 그린에너텍' 가보니

17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개막한 '2025 그린에너텍(GreenEnerTEC)'의 주요 테마는 '바이오플라스틱'이라고 할 수 있었다.올해 4회를 맞이하는 그린에너텍

기후/환경

+

'2035 NDC' 60% 넘어설까...환경부, 7차례 토론회 연다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2035 NDC)를 설정하기 위한 대국민 논의가 시작된다.환경부는 오는 19일부터 내달 14일까지 '2035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뜨거워지는 한반도...2100년 폭염일수 9배 늘어난다

한반도 기온이 매년 상승하고 있어 2100년에 이르면 여름철 극한강우 영향지역이 37%로 확대되고 강수량도 12.6% 증가한다는 전망이다. 또 폭염일수도 지

국민 61.7% "2035년 온실가스 감축목표 60% 넘어야"

우리나라 국민의 61.7%는 2035년까지 온실가스를 60% 이상 감축해야 한다는데 동의하는 것으로 나왔다.기후솔루션이 지난달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성인 200

美 트럼프 법무부 '기후 슈퍼펀드법'까지 폐지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법무부가 석유화학 대기업에 기후피해를 배상하게 하는 '기후 슈퍼펀드법'까지 폐지하려는 것으로 드러났다.17일(현지시

강릉 가뭄 '한숨 돌렸다'...'단비' 덕분에 저수율 23.4%까지 회복

한때 11%까지 내려갔던 강릉의 저수율이 지난 수요일 내린 폭우 덕분에 18일 오전 6시 기준 23.4%까지 회복됐다. 아직도 평년 저수율 71.8%에 크게 못미치는

폭염 '조용한 살인자'...유럽과 호주, 온열질환 사망자 급증

북반구와 남반구 할 것 없이 기후변화로 뜨거워진 폭염에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올여름 유럽에서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사람 3분의 2는 지구온난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