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우리는 모두 '여행자'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8-15 08:00:03
  • -
  • +
  • 인쇄
간소함의 가치, 진정한 삶의 열쇠가 돼
여행자 마음 가지면 삶이 버겁지 않아

한 대학 선배는 주기적으로 뒷산 산책을 하고 등산과 섬 여행을 즐긴다. 사업을 하는 그는 서울 인근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숲과 자연을 가까이 하며 살고 있다. 오래전 백두대간을 종주한 것이 자연친화적인 삶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부인과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해 삶의 의욕을 잃고 있을 때 누군가 그를 백두대간으로 데리고 갔다. 향로봉에서 지리산까지 690km를 종주하며 밤낮을 보냈다. 땀과 눈물이 섞이고 빗속에서 홀로 울기도 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그렇게 2년을 백두대간과 전국의 산들을 오르내렸다. 그 선배는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산을 오르지 않았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거야." 삶의 여정이 그리 평범하지 않지만 그의 삶은 언제나 간소했다. 독서와 글쓰기를 즐기는 그의 내면세계는 순수하고 서정적이다.

◇ '단순한 삶'에 대한 추구

최근들어 단순한 삶(simple lif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간소하게 살고 일하고 소유하고 존재하는 삶을 추구하는 흐름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단순성, 청빈, 간소함, 느림의 미학, 생태적 삶, 게으르게 살기, 미니멀리즘 등 다양한 이름으로 주류적 사회 흐름과 사뭇 다른 자신들만의 삶을 추구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는 현대사회의 풍요와 복잡성에 대한 반작용이자 보다 나은 삶 혹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자조적 모색일 것이다.

사실 '단순한 삶'에 대한 열망은 최근 시작된 것이 아니다. 수 천 년동안 다양한 종교 및 철학 전통을 통해 이어져온 것이다. 동서양의 여러 종교들의 수도자, 탁발승, 은둔자, 영성가들과 스토아학파의 사상가들은 금욕적 삶의 이상을 추구하고 가르쳤다. 그들은 구원, 자기완성 혹은 깨달음,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 물질적 소유와 세속적 인연을 멀리하고 모든 관능적 쾌락을 거부했다. 그리고 엄격한 생활방식과 성스러운 수행에 집중했다.

19세기의 철학자들과 루소를 비롯한 낭만주의 예술가들도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치고 고독한 삶과 산책 혹은 걷기를 예찬했다. 그들은 자연과 고독과 걷기는 놀라운 치유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간소함의 추구는 이러한 흐름들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 특유의 소외 경험에 대한 자기 치유 혹은 셀프 처방인 셈이다. 그 실천 목록들은 실로 다양하다; 자연을 가까이 하기, 산림욕이나 숲 경험, 산책, 도심의 공원이나 정원 거닐기, 도보 여행, 탬플 스테이, 등산이나 야외 캠프, 수련이나 마음 챙김, 독거하기, 잡 노마드, 적게 벌고 적게 쓰기, 디지털 미니멀리즘 등등. 이런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고 회복을 경험한다. 복잡하고 소모적인 사회의 역동을 벗어나 자연 상태의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월든>을 읽는 독자들은 소로의 숲속 생활이야기에 깊이 매료된다. 1845년 3월 어느 날 소로는 친구가 빌려준 도끼를 들고 월든(Walden) 호숫가의 숲으로 들어가 백송나무 한 그루를 잘랐다. 그는 통나무로 홀로 살 오두막을 지었다. 거기서 그는 씨를 뿌리고 자급자족하며 사색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월든>은 그의 일기모음으로 숲 생활의 이야기와 사색의 조각들을 담고 있다. 소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조용한 절망'의 상태로 살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그의 선택은 깨어있는 한 개인의 탈주이기도 하지만 당시 자본주의적 도시 문화와 탐욕에 대한 시민적 저항이기도 했다. 그는 숲으로 들어간 자신의 충동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온전히 내 뜻대로 살되 삶의 본질을 직접 마주하고 싶어 숲으로 들어갔다.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과연 내가 터득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 올바르게 살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갔다."

◇ '유목민' 그 경쾌한 삶의 지혜

프랑스 지식인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미로; 지혜에 이르는 길>에서 현대인들은 그 출구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미로를 걸어가는 것처럼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갇히지 않고 미로를 헤쳐 나가기 위해 옛 유목민들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막막해 보이는 유랑길을 생산적인 경로로 만들고 해방을 경험하며 미로를 잘 통과하기 위해서다. 그는 유목민들이 지닌 덕목을 경쾌성, 환대, 경계 감각, 연대성으로 보았다.

첫째, 유목민은 경쾌하다. 유목민은 정주하지 않는다. 늘 이동하므로 짐이 가벼워야 한다. 유목민은 자신이 접하는 새로운 사유, 경험, 지식, 교류를 자기 신체에 쌓는다. 하지만 성을 쌓지 않는다. 지켜야 할 영토가 따로 없다. 초원을 가로지르며 계절에 따라 이동한다.

둘째, 유목민은 만나는 이가 누구든 환대하고 다른 이들에게 개방적이고 정중하다. 그들의 생존 여부는 환대에 달려있다. 부드러운 관계를 만들어두지 않으면 특정지역을 지나갈 수도 없고 우물에 다가갈 수 없다. 그들은 선물을 주며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줄 안다.

셋째, 유목민은 세심하게 경계하는 감각이 있다. 그들의 캠프는 탁 트인 곳에 있으며 성벽도 함정도 없이 허술하다. 하지만 야생의 짐승이나 악의적인 적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 유목민은 언제나 진영을 거두어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돌연히 나타나는 적과 대항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넷째, 유목민은 연대적이다. 혼자서 길을 가는 유목민은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함께 이동하고 유랑한다. 노마드는 유목공동체이다. 연대의식을 체계화하고 함께 유목하지 않고서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생존하기 힘들다.

10여년 전 거실에 앉아 신문을 읽다가 동화작가 권정생 씨의 운명 소식을 접했다. 가족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말했다. "권정생 씨가 돌아가셨대, 너무 슬퍼." 알다시피 권정생 씨는 한평생 안동 촌구석에서 움막같은 집에서 살았다. 시골교회 종지기로 더부살이 하면서 일하기도 했다. 그를 직접 만나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과 언어가 너무 맑고 순수해 놀랐다고 한다.

그는 '몽실언니'를 비롯한 많은 동화작품을 남겼는데 언제나 땅과 흙 이야기를 하고 생명과 평화를 노래했다. 권정생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고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작은 자, 소수적인 사람, 흙수저들이 그려내는 별빛같은 이야기들이다. 그의 유언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세는 어린이로부터 얻어졌으니 어린이에게로 돌려줘야 하고, 5평짜리 흙담집은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나를 기념하는 일은 일체 하지 말라." 권정생,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소박한 삶의 여행자였다.

우리 모두가 숲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연을 가까이 할 수는 있다. 유목민처럼 목축을 하거나 유랑하며 살기도 어렵다. 하지만 제국의 변방에서 유목하는 노마드적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 어떤 결핍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독소는 넘쳐나는 과잉과 복잡함이 아닐까. 내 삶을 보다 단순하게 하고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갈 순 없을까?

1851년 어느 날, 소로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여행자!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 우리 인생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바로 '여행'이 아니겠는가. 개인의 역사란 결국 '어디'(somewhere)에서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현대제철, CDP 선정 기후대응 원자재 부문 우수기업 수상

현대제철이 글로벌 지속가능경영 평가기관인 CDP(Carbon Disclosure Project,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로부터 기후변화 대응 분야 우수기업으로 선정됐다.현대

'해킹사고' 부실 대응 SK텔레콤..."ESG 등급 하락 불가피"

SK텔레콤 해킹사태로 고객 개인정보가 무방비로 유출되면서 SKT의 ESG평가에서 사회(S)부문과 종합부문 등급이 1등급씩 하락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고객

KB국민은행, 올해 지역에 '작은 도서관' 9곳 더 늘린다

KB국민은행이 올해까지 134개의 'KB작은도서관'을 조성해 미래세대를 위한 독서 인프라를 확대할 예정이라고 30일 밝혔다.KB국민은행은 지난 14일에는 울

LG유플러스, CDP '탄소경영 아너스 클럽' 수상

LG유플러스가 서울 여의도 페어몬트 앰버서더 서울호텔에서 열린 '2024 CDP(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 코리아 어워즈'에서 CDP 기후변화 대응 부문(CDP Climate

11번가 사령탑 교체...신임 대표로 박현수 CBO 선임

SK스퀘어 자회사 11번가가 지난 29일 오후 열린 이사회에서 신임 대표이사로 박현수 11번가 CBO(최고사업책임)를 선임했다고 30일 밝혔다. 안정은 전임 대

경기도 푸드뱅크, 세제와 휴지 등 '생활용품'도 기부받는다

경기도가 푸드뱅크를 통해 식품뿐만 아니라 세제와 휴지 등 다양한 생활용품도 기부받고 있다고 30일 밝혔다. 푸드뱅크·마켓은 취약계층에 기부

기후/환경

+

대구 함지산 산불 '재발화'...강풍에 불씨 되살아나

이틀만에 주불이 잡히면서 완전된 것으로 알았던 대구 함지산 산불이 다시 발화하면서 주민들이 다시 대피했다. 건조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불어대는

기후위기로 야외 음악공연도 '위기'...티켓 판매부진 현상

호주에서 기후위기로 야외 뮤직 페스티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보고서가 나왔다.호주 로열 멜버른 공과대학(RMIT)이 지난 23일(현지시간) 발간한 '뮤

"해운탄소세 피하려면 '전기추진선'으로 교체해야"

탄소배출이 많은 선박을 전기추진선으로 대체하고 녹색해운항로를 개척하면 해운부문 탄소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해운은 전

기후재해 보상은 왜 제한?...손보사 車보험약관 공정위 '심판대'

기후위기로 올여름도 무더위와 수해 피해에 대한 우려가 높은 가운데 기후위기로 인한 재해 피해는 보상하지 않는 보험약관의 불공정 조항을 개정해

대구 산불 이틀째 진화율 82%...주불 아직도 못잡아

지난 28일 발생해 이틀째 번지고 있는 대구 함지산 산불이 아직도 주불을 잡지 못하고 있다.산림 당국에 따르면 29일 오전 8시 기준 대구시 북구 노곡&mid

트럼프 '해저광물' 개발규제 완화에..."생태계에 치명적" 비판

미국이 해저 광물 개발을 장려하기로 한 결정에 "해양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