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60억원대 자산가 할머니의 죽음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6-09 13: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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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소유가 주는 만족감, 한계가 있어
삶의 목적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

2005년 6월 29일, 한강 동호대교 인근에서 시신 하나가 물 위로 떠올랐다. 익사자는 반포 고급아파트에 살면서 60억원대 자산을 보유한 77세 J할머니였다. 겉으로 보면 그 누구도 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귀부인이었다. 경찰은 처음에 살인사건의 가능성을 두고 수사하다가 할머니 일기장에 '죽고 싶다'는 글이 발견되고, 새벽에 직접 콜택시를 불러 반포대교로 간 사실이 밝혀지면서 할머니가 스스로 다리 위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결론지었다. 할머니의 남편은 10년전에 집을 나가 딴살림을 차렸다. 가정부와 넓은 아파트에서 쓸쓸히 살았던 할머니에게 이혼한 40대 아들은 툭하면 찾아와 돈을 뜯어가고 딸들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거액을 요구했다. 그러다 아들과 딸들은 유산을 놓고 무섭게 다투는 관계가 됐다. 고독한데다 자식들간의 불화까지 겹치자,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심리 상태가 되어버린 할머니는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너무 많은 재산이 할머니를 죽게 만든 셈이다.

◇ 행복과 돈은 비례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 소유가 많을수록 더 행복하다고 믿는다. 소유의 양과 행복의 양은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생존이 위협받는 절대적 궁핍이나 재화의 결핍 상태에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대부분의 연구조사 결과는 흥미롭다. '물질적 부가 일정수준에 이르기까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 이후부터는 더이상 행복도와 비례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재화가 없이는 행복을 지탱할 수 없다. 청빈한 삶을 사는 수도자들조차도 자신의 노동 생산물이나 그 누군가가 제공하는 의식주에 기반해 정신적 삶을 추구한다. 게다가 경제적 수입과 삶의 질은 사회계층적 특성을 지닌다. 어느 사회든 대개 중산층이라고 분류되는 계층의 사람이 상대적으로 행복도가 가장 높으며, 중상류층은 오히려 행복도가 더 낮다고 한다. 물론 저소득층은 행복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물질은 필요하고 소중하다. 삶을 지탱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일정한 경제적 기초가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물질적 소유와 행복이 정비례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일종의 착란이자 그릇된 신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질적 부야말로 행복의 절대적 요소라고 믿는다. 그래서 돈에 집착하는 수준을 넘어 돈에 목숨을 걸고 돈을 숭배한다. 물질적 부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연구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물질이 자신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실망감을 느끼고 예전보다 훨씬 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소비할 수 있는 능력, 원하는 것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과 만족감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 돈의 주술적 힘을 숭배하는 우리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로 규정하면서 현대인은 생산된 물건의 기능을 따지기보다 그 상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세와 권위, 곧 '기호'를 소비한다고 지적했다. 이 기호를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고 한다. 시뮬라시옹은 원본이 없는 기호를 말한다. 이는 이미지의 세계, 즉 허상이다. 하지만 시뮬라시옹은 전능을 지녔다.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해 버리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상품이 아니라 그 상품의 이미지를 구매한다. 그래서 명품을 소유하면 자신이 특별하다고 착각하고 특정 브랜드 이미지를 소비하면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고 믿어버린다. 돈과 상품이 지닌 이러한 신화적 힘을 일컫어 마르크스는 '물신(物神, fetishism) 현상'이라고 지칭했다.

우리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과 돈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몸은 다르게 움직인다. 우리는 돈에 민감하고 열광한다. 재산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다르게 대한다. 가난하지도 않은데도 비교의식과 상대적 박탈감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거대한 부를 지닌 이들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 그들의 윤리성을 의심하며 질시한다. 불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접어버린다.

◇ 관계의 질이 행복을 좌우해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대학교(UCLA)의 연구자 라케시 사렌(Rakesh Sarin)과 마넬 바우셀(Manel Baucells)은 우리 삶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3가지 기본 재화를 언급했다. 첫째는 신체적 욕구다. 음식과 건강, 주거지, 옷, 성생활, 휴식이 그것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다양한 형태의 고통이 닥쳐온다. 둘째는 마음의 욕구다. 이는 공동체, 일터, 연줄, 사랑, 소속감 등이다. 이것이 결핍되면 고독이 발생한다. 셋째는 정신적 욕구이다. 평화, 안전, 신뢰, 희망, 아름다움(문화와 예술), 이해심 등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두려움과 불안이 생겨난다. 이 분류는 기본 욕구와 기본 재화의 충족이라는 단순한 틀이지만 우리네 삶의 조건에 대한 유익한 도해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기본 재화의 대부분은 우리가 맺는 관계와 밀접하다는 점이다.

오래전 네델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행복과 불행은 우리가 애정을 느끼는 대상의 질에 달려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와 신체의 만남 즉 우리가 마주하는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의해 존재가 좌우된다. 행복의 열쇠는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신선하고 생명을 주는 정서적 나눔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평화란 신, 즉 자연의 음률에 자신의 신체를 조율할 때 주어진다고 말한다. 즉 기쁨의 정서를 창조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철학은 기쁨의 윤리학이자 기쁨의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들을 새롭게 할 일이다. 돈이나 이해관계와 권력이 관계의 중심에 꽈리를 틀면 슬픔과 긴장감이 감돈다. 너와 내가 마주한 사이 공간에 기쁨과 사랑이 솟구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보다 수평적으로, 보다 솔직하게, 보다 겸허하게, 서로 배려하는 방향으로.

삶의 목적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존재하는 것에 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존재 양식을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To have(소유)와 To be(존재) 사이에서의 선택이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소유란 단지 물질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명예, 권력, 지식, 기술, 사랑, 관념, 사람(자녀나 배우자, 친구나 동료 등)을 '소유'해 자신 안에 가두려 한다면 이 역시 소유적 삶의 방식이다. 프롬에 따르면 소유는 근원적으로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 소유한 것을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나의 소유가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최근 몇 년간 한국 내 여러 생태마을과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이들의 해맑은 얼굴과 순수함, 자연과 노동을 소중히 여기는 삶, 생태와 평화 가치, 적극적인 지역사회 활동 등이 인상적이었다. 공동체들을 점점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깊이 주목했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지니고 있었고 거의 모든 사안을 함께 의논해 결정하고 있었다. 나아가 촘촘한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사각지대가 없이 서로 돌보고 지원하고 있었다.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과 축제적 활동, 학습 및 동아리 활동으로 공동체적 기쁨이 샘솟도록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이뤄 산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배치와 만남의 질을 다르게 하여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삶을 살기로 선택한 사람들로 보였다.

우리도 다르게 살 수 있다. 그것은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 가능하다. 내가 자리잡은 현장에서 관계의 질을 새롭게 하는 실험을 해보자. 돈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소소한 쾌락의 탐닉을 넘어 만남의 기쁨을, 고독한 몸부림에서 연대와 협동의 동행을 선택해 보자. 그 출발점은 다름 아니라 내가 타자에게 전하는 눈빛과 내미는 따스한 손길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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