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나는 어떤 향기의 사람일까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09-08 0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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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지닌 사람들, 각박한 세상 아름답게 해
마주하는 한 사람에게 미치는 향기가 더 소중하다

몇 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만델라는 27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뒤 73세의 나이에 자유를 얻었다. 40대 중반에 투옥돼 백발의 노인으로 출옥한 것이다. 그는 백인 정부의 고문과 회유,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외국으로 망명을 가서 편히 살 수도 있는데도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신념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 그 정신이 더 위대해 보였다.

감옥에서 그는 행복하게 지냈다. 죄수 신분인 그는 신사였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도 잃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교도관들은 그를 정중하게 대했으며 점점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간미에 매료된 것이다. 심지어 교도관들이 그에게 상담을 청하기도 했다. 이후 대통령이 된 만델라가 당시의 교도관들을 초대해 식사하는 장면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람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온 만델라의 품격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내 속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만델라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인종차별 반대운동,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노벨평화상,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등 그의 업적을 나타내는 수많은 수식어는 그의 인격 및 내면세계와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진정 사람의 향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 '우분투' 정신 지닌 짙은 사람의 향기

우분투(Ubuntu). 이것이 만델라 삶의 방식이자 정치철학이다. '당신 덕에 내가 있다.' 이것은 일체감과 유대, 인간애를 의미하는 아프리카의 인도주의적인 철학 '우분투'의 의미다. 우분투에는 인간적인 정과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망, 허심탄회한 솔직함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이 담겨있다. 그 요체는 사람은 혼자서 고립된 채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는 더 큰 존재의 일부이며 이것이 사람의 삶의 전부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런 삶의 가치와 정신의 바탕 위에서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역사 청산과 화해와 일치의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만델라의 장례식에서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다음과 같이 추모사를 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인간의 정신을 결속시키려는 유대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는 '우분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만델라가 남기고 간 가장 위대한 선물을 잘 설명해줍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 묶여있다는 깨달음입니다. 또한 인류는 하나라는 깨달음이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때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사람의 향기는 어디서 나올까? 한 사람의 사람됨에서 나온다. 그 향기는 말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문제를 대하고 해결하는 방법론으로도 나타난다. 악취를 풍기고 독성을 내뿜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잔잔하고 그윽한 향기를 내는 사람이 있다. 글에도 향기를 담을 수 있다. 언어의 배치와 리듬 속에 사람의 향내와 문학적 감흥이 그대로 담긴다.

건축물이나 물건에도 어떤 향기가 배여 있다. 높이 치솟은 고층 빌딩과 유리체 건물들은 우리에게 성공주의와 권위주의와 같은 위압감을 내뿜는다. 반면 막돌로 지은 옛집이나 시골집들은 향긋한 정취를 안겨준다. 어떤 정당의 정책이나 작은 입장문에도 마찬가지다. 정직함과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가 드러나기도 하고, 정반대로 거짓과 뻔뻔함으로 가득한 악취가 물씬 풍기기도 한다.

나의 신체, 나의 삶, 나의 언어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는 어떤 냄새가 나고 있을까? 잃어버린 향내를 복원하지 못하고 싸구려 향수를 만들어내어 꾸미는데 급급한 것은 아닌가?

우리들이, 우리 사회가 우분투의 마음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고 그 개념을 그대로 수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남아공에 우분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인내천(人乃天), 도산의 애기애타(愛己愛他) 정신이 있다. 우리의 우물에서 우분투와 같은 생수를 길어올리면 되는 것이다.

◇ 한 사람에게 전하는 향기가 더 강력해

가장 깊은 향기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미치는 향기일 것이다. 탁월한 사상가가 남긴 사유나 성스러운 사람들의 일화나 가르침이 남기는 향기는 그 파장이 크다. 그 향기를 맡거나 전염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절실한 것은 내가 지닌 향기, 서로가 나누는 향기일 것이다.

경상도 시골마을에 사는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꿈은 초등학교를 마치면 산 너머 고무신 공장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 근교에서 한 선생님이 부임했다. 선생님은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했다. "너는 왜 공부는 하지 않고 맨날 공만 던지고 있니? 넌 머리가 좋은데 공부를 하면 큰 사람이 될 수 있단다. 세상에 고무신 만드는 공장이 가장 큰 것이 아니란다."

선생님은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도시의 학교에 가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경주에 그런 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아이는 공부하기 시작했다. 죽도록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나아가 그는 법대에 진학하고 4학년 때 사법고시를 패스해 변호사가 됐다.

이후 우리나라 굴지의 로펌을 만들고 변호사 활동과 함께 여러 공익적 사회적 활동들을 했다. 10여년 전 그 변호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선생님의 말씀이 나에게 사건이었다. 내 시야를 바꿔주고 실제적인 방법까지 제시해 주셨다." 한 아이를 눈여겨보고 길을 안내한 그 선생님에게서 교사의 향기, 사람의 향기를 느꼈다.

자신의 글이나 기술이나 작품, 활동이나 사업을 통해서도 향기를 전할 수 있다. 하지만 향기가 진정 힘을 지니는 것은 우리 개개인의 눈빛과 언어와 말투와 체취를 담을 때 일 것이다. "몸은 이 세계에 내린 닻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몸의 현상학자로 유명한 메를로 퐁티의 비유다. 그의 말처럼 신체가 마주하지 못하는 만남은 공허하며, 우리 몸이 함께 하지 못하는 향기의 나눔은 한계가 있다. 서로의 체온과 따스한 말이 담긴 온도의 공동체 속에서 사람의 향기는 비로소 빛을 발한다. 내 이름, 내 존재, 내 향기를 널리 전파하려 하기 보다 그저 존재함으로 풍기는 향기가 가장 자연스럽다. 그 누군가가 나에게 전해주는 향기가 가장 가치있고, 내가 만나는 '그 한 사람'에게 내가 나누는 향기가 가장 숭고하다.

얼마전 서울 강동구에 있는 한 청소년대안학교 선생님을 만났다. 그 분은 큰 슬픔에 젖어있었다. 가르치고 돌보던 한 청소년에게 예기치 않은 큰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애써 그 충격과 슬픔을 감췄지만 통곡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누구로부터 따스한 돌봄을 받지 못하는 학교밖 청소년들을 깊이 사랑하는 그 마음이 곱고 향긋했다. 조심스레 질문을 했다. "잠은 잘 주무시나요?" "애써 잠을 청하고 있어요." 아픔이 짙다. 그 아픔의 깊이만큼 짙은 농도의 향기가 나에게 전해졌다. 아, 아픔에도 향기가 있구나! 그 향기에 감염됐다. 과연 나는 어떤 향기의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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