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한 초식 인간의 슬픈 저항 –한강의 <채식주의자> 씹어읽기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10-11 13: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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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사진=연합뉴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재미있다'고 반응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재미는 쓴 맛일 것이다. 제목과 달리 이 소설은 채식을 예찬하는 소설이 아니다. 육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니 살육문화에 저항하며 희생되는 한 연약한 초식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 남편의 1인칭 화자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 당신들은 나를 몰라


아내 영혜는 어떤 꿈을 꾼 후 한 밤중에 일어나 냉장고 속의 온갖 식재료를 정리하여 쓰레기로 내버린다. 이후 그녀는 일체의 고기가 없는 야채 중심의 식탁을 차리고 식습관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아내의 돌변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설 속 화자는 이렇게 푸념한다.

"무슨 귀신에 쓴 것도 아니고, 악몽 한번 꾸고는 식습관을 바꾸다니. 남편의 만류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저 고집스러움이라니." (21쪽, 채식주의자, 창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22쪽)

남편의 이런 생각은 우리네 질서에 익숙한 모든 이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처형 집의 아파트 입주 집들이로 모인 가족 모임에서 영혜는 육식을 강요당한다. 영혜는 그간 좋아했던 굴무침조차 입에 대지 않는다. 사정을 알던 장인이 호통을 친다. 처형은 야무지게 영혜를 나무한다. 장모는 온갖 육요리를 딸 앞으로 펼쳐놓으며 먹으라고 채근하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영혜 입 가까이 내민다. 그러자 영혜는 몸을 뒤로 젖히며 거부한다. 그 순간 장인은 딸의 뺨을 후려갈기고 사위와 아들로 하여금 영혜 팔을 붙잡게 하고는 탕수육을 영혜의 입으로 쑤셔넣는다. 우리 인류에게 아주 익숙한 원시적 제의다. 아버지의 폭력은 마치 병자에게 행하는 치료 주술이자 사랑의 의무인 듯이 보인다. 이처럼 육식 문화의 이데올로기는 집단적이고 폭력이고 거룩하다.

아버지가 탕수육을 강제로 집어넣자 영혜는 '으르렁거리며' 탕수육을 뱉어낸다. 몸을 웅크리 채 현관 쪽으로 달아나는가 싶더니, 교자상에 놓인 과도를 집어들어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 흥건한 핏물과 쓰러진 영혜의 몸은 말한다. 난 싫어! 초식인간에겐 자해라는 방법 외엔 저항할 방법이 없는 걸까.


◇ 아픈 건 가슴이야


영혜는 일련의 꿈들을 꾼다. 소설 곳곳에 여섯 개의 끔찍한 꿈 이미지와 영혜의 독백이 삽화처럼 배치되어 있다. 어릴 적 기억과 신체적 경험의 이미지 조각들이 꿈의 자막에 상영되고 무기력한 독백이 배음처럼 들리는 방식으로 꿈 시리즈는 진행된다. 꿈의 서사는 꿈 꾼 이의 일기 기록처럼 보인다.

· 나의 옷과 입에 피가 묻어있고,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은 이야기 (꿈1)
· 얼어붙은 고기 덩이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고, 식칼의 이가 나간 이야기 (꿈2)
· 누군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 숨겨둔 꿈. 마치 내 손으로 죽인 느낌 (꿈3)
· '정육점 앞을 지날 때 입을 막아. 흘러내리는 침 때문에.' (꿈4)
·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를 아버지가 달리다가 죽게 한 후 요리해서 먹을 때, 나도 한 입 먹은 어릴 때의 기억.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꿈5)
· '손목은 괜찮아. 아픈 건 가슴이야.',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 날 살릴 수 없어. ~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꿈6)


몸이 말한다. 영혜의 몸이 말한다. 트라우마는 그녀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지금 꿈속의 음식들로부터 도망치다 붙잡혀 있는 듯 하고, 꿈속의 입맛이 마구 침을 흘리게 한다. 무섭게 말하자면 꿈속의 칼이 자기 손목을 그어버렸다. 어떤 이론이나 정신분석적 해석을 도입하여 해석하는 것은 문학작품 읽기의 방법으로 유쾌하지 않아 보이지만,그런 렌즈가 없어도 이러한 꿈 이미지들은 문자화할 수 없는 소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영혜에게 꿈과 현실은 구분되지 않는다. "설핏 의식이 나가자마자 꿈이야, 아니 꿈이라고도 할 수 없어." 꿈 속에서 말한다.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


◇ 물어뜯지 마!


남편이 입원 중인 아내를 찾아갔을 때 영혜는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있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 근처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그녀는 환자복 상의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앙상한 쇄골과 여윈 젖가슴, 연갈색 유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의 붕대를 풀어버리고,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 입술은 루주가 마구 번진 듯 피에 젖어있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있었다." (65쪽)

단편 <채식주의자>의 이 엔딩은 극적인 반전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을 남긴다. 소설의 제목이 '채식주의자'이고, 영혜는 한사코 육식을 거부했는데 그녀가 동박새를 물어뜯었다면, 이 소설이 말하는 '육식 거부'와 '채식'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녀가 가슴을 드러내고 앉아있는 모습을 행위 예술로 읽는다면, 이빨에 물어뜯긴 '작은 동박새'를 영혜 자신으로 읽는다면 소설 이야기의 감도가 달라진다.

물어뜯는 이빨과 고기를 써는 칼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식당이나 정육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식탁과 가족이라는 핏줄 안에, 나의 말과 관계들 속에, 우리 문화와 조직들 안에, 국가와 역사 속 깊숙이까지 있다. 살육의 무기와 핏빛은 도처에서 일렁거린다. 내 몸과 내 속에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 멸종한다. 소설에 피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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