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나는 왜 걷는가?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10-09 0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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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가 유행이다. 공원의 산책로, 숲속길, 둘레길, 해변 등에서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때로는 걷기 위해 여행이나 순례길을 떠나기도 한다. 모든 걷기는 동일하지 않다. 여러 형태가 있다. 스타일이나 공간 배치, 걸음의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문학작품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걸음을 발견할 수 있다. 행진처럼 주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맹목적 걸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배회하듯 충동적으로 이끄는 걸음, 또는 진정한 사유의 걸음까지.

◇ 행진, 행진, 행진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에는 흥미로운 행진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인공 야콥은 자신을 나폴레옹 휘하의 병사라고 상상하며 러시아로 향하는 긴 행진을 묘사한다. 병사들은 대오를 이루어 강한 결속력을 유지하며 전투를 향해 전진한다. 그들은 매일매일 피곤에 지치고, 일부 병사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행군 속에서 탈진한다. 그런데 황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열광에 휩싸여 환호하며 다시 힘을 얻는다. 이 행진은 황제와 제국의 영광을 위해 동원된 병사들의 장거리 행진이다. 점령과 '승리'라는 목표는 그들을 계속 걷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두 페이지의 행군 묘사에서 '우리는 행군한다'는 표현이 10번 이상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이동 이상의 상징을 내포한다. 행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식(ritual)이자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일종의 자기 강화 행위라는 것이다. 행진은 병사들의 의지와 체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끊임없이 시험하는 행위로 변모한다. 그 대목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렇게 행군은 계속된다. 모스크바를 향해… 이것이 나폴레옹 지휘 하에 있던 어느 병사의 삶이다." 이 구절에서 그 반복적인 행진이 마치 삶 자체인 것처럼 그려진다. 로베르트 발저는 개인의 자유를 포획하고 정해진 방향으로 몰아가는 집단주의적 열광, 강요된 삶, 제국적 질서에 대해 우회적인 비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 이처럼 강요된 행진과 박제화된 걸음을 벗어나 자유롭게 걷을 수 있을까?

◇ 충동적 배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빈의 프라터 공원을 배회하는 한 여인의 걸음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 에리카의 걷기는 단순한 산책이 아니다. 에리카는 통제되지 않는 특이한 충동에 이끌려 공원을 헤치며 나아간다. 그녀는 풀밭을 가로지르며 걷고, 숲으로 무작정 나아간다. '암흑에 이끌리는 에리카는 덤불과 숲 그리고 개울들이 길게 늘어져 태연하게 펼쳐진 잔디밭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전진한다. 걷고 또 걷는다. '가끔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 하지만 그대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녀는 계속해서 전진하다가 마침내 도착한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정사를 벌이는 남녀를 발견하고 이를 훔쳐본다.

공원을 배회하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전진한다' 혹은 '걷는다'는 표현이 10번 이상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 행위의 무작위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을 한껏 부각시킨다. 그녀의 배회는 일상적인 산책이 아니라 혼란의 어둠 속을 내달리는 분열증적 걸음으로 그려진다. 남녀의 정사 장면을 망원경으로 살피고 탐색하듯 훔쳐보는 관음증은 그녀 혹은 우리에게 만연한 욕망과 무의식적 충동을 언뜻 보여준다. 독자들은 그녀의 걸음에서 운동이나 보통의 산책과는 전혀 다른 질감을 느낀다. 걷는 이의 내면의 갈등, 충동적인 욕망, 분열 그리고 현실과의 부조화를 드러내는 심리적 흔적이 바로 그것이다.

◇ 도시 산책자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집 <일방통행로>는 도시를 산책하는 저자의 걸음과 낯선 시선을 잘 보여준다. 벤야민은 거대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온갖 도시 풍경을 접한다. 그는 자신이 걷고 있는 도심의 거리와 가게, 자신이 마주하는 건물들과 사물들, 표지판과 상품 등 온갖 소소한 경험들을 글로 담는다. "벤야민은 도시의 이정표를 그냥 지나친다. 그 대신 그는 대도시의 진부하고 사소한 부분의 의미를 강조한다."(그램 질로크,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그는 우리 도시인의 사소한 길거리 경험들을 포착하고 탐구하여 도시생활의 단편화, 상품화, 획일성, 주변화를 날카롭게 묘사한다.

벤야민은 '도시를 배회하며 관찰하고 사색하는 사람' 즉 플라뇌르(flâneur)라는 개념을 중시한 작가였다. 하지만 그가 발걸음을 내딛는 공간은 도로와 건물들로 구획 지어져 온갖 홈들이 패여 있는 각진 공간이다. 그는 자본주의와 현대 사회의 여러 구조적 문제를 비판한 작가이자 철학자다. 흥미롭게도 그는 당시 논객들이 단골메뉴로 다룬 생산양식이나 사회 시스템이 아니라 도시의 구조, 거리와 아케이드, 상품과 광고, 소비의 양식, 도시풍경 등을 주로 다뤘다. 즉 생산이 아니라 소비자와 도시의 어둠 등에 묘사하면서 획일성과 물신성에 빠진 개인의 자율성 상실을 그려냈다. 따라서 '일방통행로'라는 은유는 자유가 억압되고 획일화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문학적 소묘와 메타포로 읽을 수 있다. 그의 걸음은 단순한 배회가 아니라 비평적 사색과 통찰이 담긴 걸음이었다.

레베카 솔닛은 '걷기'를 단순한 이동행위가 아닌, 사유와 발견의 과정으로 예찬한다. 그녀는 걷기를 통해 새로운 공간과 접속하고,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며, 그 과정에서 삶이 변형된다고 강조한다. 이때 걷기는 단순히 신체적인 활동을 넘어 사물들과 조우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이다." 우리는 걷기를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이어진다. 걷기는 세상의 단절과 고립에 맞서는 저항이며, 끊어진 관계와 조각난 마음을 이어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걷는 일은 우리 삶을 근원적으로 어루만지고 새롭게 하는 사건적 행위다.

걷기는 질주하는 삶의 속도에서 벗어나, 천천히 그리고 깊이 있게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도시의 거리를 걷느냐, 자연 속을 걷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요소일 것이다. 걷는 이의 의식과 시선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자동차와 다양한 교통수단에 의존하여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하려 한다. 슬프게도 그 과정에서 온갖 사물과 풍경과 경험들을 놓치게 된다. 더구나 탈 것에 온 몸을 올리고 스마트폰에만 눈길을 주고 있는 기계적 이동은 그런 소외를 가속화시킨다.

걷기는 우리를 둘러싼 구조의 박자와 속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리듬에 맞춰 걸음을 내딛는 일종의 저항이자 자유를 향한 몸짓이다. 우리의 걷기가 그저 발걸음을 옮기는 반복에 그치지 않기를. 우리 걸음에 열린 감각과 자유의 힘이 일렁거리고, 섬세한 지각으로 매순간 마주하는 풍경과 사물을 조우하고, 때로 사색할 수 있다면 우리의 경험이 얼마나 다채로워질까. 그런 발걸음이야말로 삶을 다시 조율하고 새로운 길로 이끄는 첫 걸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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