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영혼 건강을 위한 네 가지 연습
[칼럼]영혼 건강을 위한 네 가지 연습
영혼을 무시하는 리더는 열매 맺을 수 없다
  • 민디 캘리과이어(Mindy Caliguire)
  • 승인 2019.01.03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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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적 우정

영적 우정이란 내가 항상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둘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영적인 벗들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준다.

 

리더들은 외로운 삶을 살면서도 안 그런 척 한다. 이런 가식을 스스로 잘 알 때도 있고, 스스로 속을 때도 있다. 영적 우정은 말로만 “무엇이든 함께”everything is together라고 외치는 가식의 가면을 매우 구체적으로, 인간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벗겨낸다. 이것을 “훈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연약함을 극복하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토비아스가 내게 말했다. “내가 우정에 관해서 연구하게 된 것은 바로 신학교에서 ‘회중에서 결코 친구를 만들지 말라’는 충고를 듣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가 신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이런 것이었다. “회중은 당신을 존경해야 한다. 당신에게서 모범을 보아야 한다. 당신의 고민거리들을 그들과 나눈다면, 리더로서 당신의 역할은 허물어질 것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고통스런 탈진을 겪고 난 다음에야 마침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의 성공을 위해서 우리가 거짓된 삶을 살고 있구나.’” 혼자서 말이다.

다들 인정하듯이, 진정한 우정에 이르는 길에는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나 홀로 거짓의 삶을 계속 살아야 할까? 아니면, 생명과 자유와 변화의 소망을 품고서 이런 위험들을 헤쳐 나가야 할까? 이것은 근거가 확실한 소망이지만, 영적 우정을 맺기 위해서는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하고, 또 훈련해야 한다.

2. 침묵기도

여러 그룹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종종 두 가지에 놀란다. 하나는, 살아있는 기도의 경험을 누리는 리더가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기도가 부족하다는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는 리더가 많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이중의 불행이다. 이러니 우리가 기도에 관해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크나큰 치유와 공급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임한다. 린은 평생의 영적 친구인데, 특별히 나에게 기도의 안내자가 되어 주고 있다. 그녀가 몇 년 전에 내게 침묵기도centering prayer[향심기도]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내 영혼을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께 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침묵기도에는 많은 말, 많은 안건, 많은 간구가 필요치 않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마음을 열고, 엎드려, 고요하게 쉬는 것이다. 침묵기도는 동양의 신비주의처럼 영혼을 비우는 것이 아니다. 침묵기도는 내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내 영혼이 고요하고 잔잔해지는 것을 배울 때까지 훈련하고 또 훈련해야 한다.

일주일 동안 하루 20분 침묵기도를 해 보라. 당신의 내면에 잡념들과 잡상들이 침투해 들어올 것에 대비하라. 그렇더라도, 당신은 가뿐히 그것들을 물리치고 영혼의 고요로 돌아 갈 수 있다(처음에 나는 1분에 1000번은 잡념이 떠올랐다). 린이 일러주었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집중하고자 하는 내 마음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집중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빈번하게 흔들릴 때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시편의 시인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시131:2)

3. 고독

여기서 고독은 곧 하나님과 함께 홀로 있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리더들이 고독을 매우 좋아한다. 고독이 머리를 맑게 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고독이 영혼을 풍성하게 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은 그렇게 못하고 있을 뿐이다.

 

고독이 이렇게 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독하지 않다면 내 마음을 빼앗아갔을 많은 것들로부터 고독이 나를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자아에, 우리의 자만심에, 우리의 두려움에,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에,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 다닐 수 있다. 고독은 성령이 아닌 다른 음성들을 분별하고 맞설 수 있게 해 준다.

고독은 또한 보호받지 못하면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나만의 것들을 지켜준다. 당신이라면 어떤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당신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술가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창조성을 잃어버릴 것 같아.” 장로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분별력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리더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비전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어.”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주목해 보자. 꼭 하셔야 하는 “경주”를 마친 다음에,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셨다.”(막1:35)

예수님은 고독 가운데서 당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재확인하셨다. 고독 가운데서 예수님은 당신의 단호한 결심에 불을 지폈다. 오늘날처럼 소란스러운 소리들에 둘러싸여 있는 리더들 중에 확신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내적 결심이 필요하지 않은 리더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두에게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4. 단순함

온통 시끄럽게 단순함을 떠들어대는 이때에 중요한 것은, 성경의 관점에서 무엇이 단순함이고 무엇이 단순함이 아닌지 분명하게 분별하는 것이다. 당신이 <리얼 심플> 매거진의 관점을 따른다면, 당신은 단순함을 당신의 삶에서 복잡함을 제거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이해할 것이다. 삶을 더욱 잘 관리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멋진 말이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단순함은 이런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단순함의 적은 이중성이다. 복잡함이 아니다. 이중성이란 곧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복잡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라면, 사도 바울은 단순함에 거의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바울은 더없이 깊이 통합되고 집중된 삶을 살았다. 바울의 삶의 목적은 단일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단순함이다.

지나치게 많은 스케줄을 잡는 것은 단지 내 삶의 복잡한 것들을 관리하는 데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더 깊은 영적 문제가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정직하지 않은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나치게 많은 스케줄을 잡는다는 것은 곧 자기통제를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단순함의 기초는 한 마음을 품는 것이다. 예는 “예”라고 하고, 아니오는 “아니오”라 해야 한다. 단순함에서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잡다한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 단순함은 자아를 온전히 하나님의 목적에 합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차원, 모든 생각,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부분에서 이중성에 맞닥뜨리는지 자신을 살펴보라고 말한다. 나의 본모습 이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얻기에 합당한 것 이상을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려고 애쓰는 것일 수도 있고, 나의 본모습을 감추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 각자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집중하고,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단순함을 향해 용기 있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이것이 단순함이다.

이것이 우리를 영혼의 건강으로 이끈다.

출처 :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 2016년 5월호 '영혼의 건강을 위한 네 가지 연습' 중에서

민디 캘리과이어(Mindy Caliguire) 이 글을 쓸 당시 그는 일리노이 사우스배링턴 윌로크릭교회 영성형성 디렉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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