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선 웹소설] 부끄러움을 감추다17
[구유선 웹소설] 부끄러움을 감추다17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 홍성사 출간
  • 구유선
  • 승인 2019.01.0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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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구유선 작가의 심리소설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를 새롭게 각색한 내용이다. 구 작가는 감춰왔던 수치가 곪아 터지며 시작되는 고통과 아픔을 형상화 하면서 ‘부끄러움’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들춰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조직, 부끄러움을 감추고 사는 관계, 부끄러움도 극복하는 신앙의 힘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심리 이론이 들어간 새로운 형식의 문학을 즐겨보시길 바란다. –편집자주

* 피해의식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동네에서 외떨어진 우리 집 텃밭에 부모님이 지어놓은 자그마한 천막집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사업 실패로 부모님은 집 두 채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중학교도 어렵게 입학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생활이 그리 쉽지 않았다. 6학년 때부터 돌리기 시작한 신문을 중학교 와서도 돌려야 했기 때문에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신문은 나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오빠들도 신문을 돌리고 학비를 마련했기 때문에 내가 신문을 돌리는 일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 입학한 중학교에 가면 나는 특별한 아이였다. 크림을 바르지 못해 손이 푸석푸석하고 옷이 더럽고, 말도 없고, 숙기도 없고, 전교 꼴찌에 가깝도록 공부도 못하는 그런 아이였다. 나에게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있다면 그것은 옆에 앉은 짝꿍이었다. 그런데 이 짝꿍은 80센티미터 되는 길쭉한 책상에 반은 늘 줄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아이였다. 신문을 돌려 번 돈으로 가끔씩 맛있는 것을 사주면 사주는 날만 잘해주고 다음 날이면 마음이 돌아서 버리는 아주 변덕스런 아이였다. 한 번은 쉬는 시간이었다. 어쩌다 가운데 라인에 내 손이 넘어갔다. 눈빛이 오소리 눈빛처럼 날카로워지더니 검은색의 작은 칼을 내 새끼 손가락에 갖다 대었다. 순간 그 동안 참아왔던 내 감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아이에게 내가 앉던 의자를 냅다 집어 던지는 과잉행동을 벌이고 말았다. 다행히 책상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서 그 친구의 몸은 상하지 않았지만, 나는 한 학기 내내 반성문을 쓰고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하며 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처절한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담임선생님이 “왜 책상을 집어던졌니?” 정도는 물어봐 주었어야 했는데 아무도 것도 물어봐 주지 않았다. 하기사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 한들 한 학기 동안 당했던 그 친구의 변덕스러움과 못된 행동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반성문은 이러한 상황을 벌인 것을 잘못했다는 똑같은 말만 반복해서 쓸 뿐이었다. 짝꿍이었던 그 아이와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화장실 청소를 부지런히 했다. 공부를 중간 정도 했던 짝꿍과는 더 이상 짝을 하지 않았고 다른 친구들과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담임 선생님은 아주 간단하게 엄마가 있는 곳으로 전학을 가라고 했다. 부모님이 찾아 오지도 않고 전학을 위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니 담임은 나를 관심 밖의 아이로 돌덩어리처럼 무정하게 취급했다. 담임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문제아로 낙인 된 처참한 기분.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을 때도 친구들은 나에게 냉혹한 한마디를 던졌었다.

“너 동정 받으려고 일부러 쓰러졌지?”

동정이나 해주고서 그런 말을 하면 분노가 일지를 않겠지만, 털끝 만큼의 동정을 주지도 않아놓고 그런 식의 말을 하니 한 한기 내내 화가 끓어올랐다. 공부도 못하고, 가난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 아이들이 나에게 보낸 시선은 바로 그런 거였다. 나는 늘 혼자 밥 먹었고, 혼자 있었다. 나도 다가가지 않았지만 아이들도 나에게 다가와 아무런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가난한데다 공부까지 못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그렇게 대우해도 된다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결심했다. 경제적인 가난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공부만은 내 의지에 의해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믿었다.

 

1학년 2학기 때 신문 돌리는 것을 과감히 그만두고 미친 듯이 공부를 시작했다. 특별히 공부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앉아 교과서를 달달달 외우고 또 외우면서 무조건 반복하고 반복했다. 예습과 복습을 하는 행위가 내 몸에 밸 정도였으니까.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때는 360명 중에 350등으로 꼴찌에 가까웠던 나는 전교등수가 150등 가까이 올라갔다. 내 성적 덕분에 학교에 '향상상'이라는 것이 생겼다. 기말고사 때 나는 또 100등이 올랐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1학기가 때 되었을 때 다시 60등 정도가 올라 전교 60등 안에 드는 소위, 10등 안에 드는 상위권 안에 아이가 되었다. 성적 향상으로 중학교 2학년이 들어서면서 나는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무렵, Y를 만났다. Y는 나와 같은 반이었고, 복숭아 속살처럼 뽀얀 얼굴이 나만 보면 늘 활짝 웃어주는 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긴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그냥 다가와서 장난을 치면 되는데 Y는 전혀 장난을 치지 않았다. 나 또한 Y 앞에서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라 어벙벙한 바보처럼 굴었다. 다른 친구들과는 수다를 떨고 서로에게 지우개나 휴지를 던지며 괜스리 툭 치고 건드리며, 뛰어다니며 짓궂은 장난을 치며 놀았다. 하지만 Y는 늘 얌전했다. 그런데 2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수업을 파한 후 교정을 나서는데 Y가 나에게 다가와 수줍게 말했다.

“너희 집 놀러가도 돼니?”

우리 집에 오고 싶다는 말에 나는 좋으면서도 당황하고 말았다. 나의 천막집을 보여준 후 Y가 나에게 어떤 반응을 할지 걱정이 되었다. 1학년 때 왕따를 당해본 나로서는 집을 공개한다는 일은 다시 공포를 재현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 돼!”

고개를 저으며 내가 강하게 몇 번 거절을 하자, 내 사연을 모르는 Y는 실망한 표정을 띠고 수줍게 등을 보이고 돌아가 버렸다. 그 순간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Y를 집으로 데려 갈 수 없는 현실이 쓸쓸하다 못해 참담하도록 비참했다. 도저히 그 천막집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누추한 집을 보는 순간 Y가 떠나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실망하고 돌아서서 가버리는 Y의 뒷모습을 전봇대 뒤에 숨어 지켜보면서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Y를 집에 데려가지 못한 그날, 일 년 만에 자식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해서 엄마가 오셨다. 일 년 내내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엄마가 오면 엄마와 하룻밤을 지내는 날, 늘 엄마를 꼭 끌어 안고 물고 빨고 안고 그 동안의 그리움을 하루 만에 해소하기도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Y가 나의 집에 오고 싶어 했던 그 날만은, 엄마가 온 시간들이 마치 우주 밖으로 날아가 버린 것처럼 엄마가 지겹도록 미웠다. 안에 있는 분노를 폭발하지 않으면 나 스스로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비닐 하우스 속의 보라빛깔의 보온천을 두른 천막집 뒤에 있는 뒷산이 떠나갈듯 엄마에게 소리소리 치면서 울며 발광을 했다. 집 밖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불 빠진 연탄재를 모두 박살 내고 말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왜 자식들을 이 모양 요꼴로 만들어 놓고 지방으로 피해서 살아가버리면 다냐고? 나를 왜 낳았느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엄마의 가슴에 비수를 갖다 꽂았다. 엄마는 천막집 앞에 심어 놓은 감나무를 잡고 서럽게 울고, 나는 뒷산에 가을이면 좁살만한 열매가 빨갛게 익어 즐비한 보리앵두 나무 숲에 들어가 쭈그려 앉아 울고 또 울었던 날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자마자 Y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Y는 나를 향해 뽀송뽀송한 미소를 날려주었다. 그날 이후, Y는 나에게 왜 집에 데려갈 수 없는지, 묻지 않았다. 나의 집에는 데려가지도 않으면서 나는 부지런히 Y가 보고 싶을 때면 Y의 집에만 놀러다녔다. Y는 그런 나를 싫다고 하지도 않았고 나와의 관계를 끊지도 않았다. 나는 더 적극적으로 Y에게 다가갔고, 편지를 주고 받으며, 좋아라 했다. 그렇게 Y는 나를 받아주었다.

여름 방학이 되자,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지내야 했기 때문에 Y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고 나는 시골로 내려갔다. 서해 바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주 Y에게 편지를 썼었다. Y에게 선물해 주기 위해 조개껍질을 하나하나 모아 목고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방학 내내 잔득 써 놓은 편지는 주소를 잊어버려 보내지도 못했다.

 

방학이 끝난 후, Y가 방학 내내 편지를 기다렸다고 툴툴거렸다. 편지는 주지 못했지만, 오색빛깔 조개껍질로 만든 목고리를 주자, 나를 더 없이 행복하게 만든 Y의 미소! 손재주가 좋아서 Y는 내 생일이면 바시락거리는 투명의 비닐에 한 알 한 알 모아 마치 하얀 수국처럼 예쁘게 사탕부케를 만들어 주었다.

얼굴도 예쁘고 피아노도 잘치고 가야금도 잘 치는 Y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늘 자랑스러웠다. 게다가 중학교에서 전교 60등 안에 든 학생들을 모아 따 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Y가 우수반 안에 속해 있었다. 나는 Y와 동등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예습 복습을 반복했다. Y가 보는 앞에서는 나는 뭐든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언어능력이 뛰어나, 영어와 국어를 잘했고,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기도 했다. Y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결국 가야금 연주에 재주가 비상했던 Y는 서울에 있는 예술고등학교를 들어갔고, 가난했던 나는 명문이면서도 등록금이 아주 싼 국립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서로 학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연락을 끊지 않고, Y와 나는 방학 때면 만났다. 매운 쫄면을 먹으면서도 Y와 있는 시간들이 즐거웠다. Y에게 우리 집을 공개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천막집이 있는 그 자리에 아담한 벽돌집으로 새 단장을 하고나서야 겨우 Y를 집에 데리고 갔다. 나의 친구 중, Y가 우리 집 최초의 방문객이었다. 그것도 Y네 아파트만큼은 훌륭한 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궁궐이었다. 그렇게라도 공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고 Y 앞에 당당해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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